언젠가부터 저녁 약속이 생기면 정해진 시간보다 30~40분쯤 먼저 도착해 식당 주변을 천천히 돌아다니며 동네 분위기를 파악하는 취미가 생겼다. 그 무렵의 주택가는 차도 많이 다니지 않아 걷는 것만으로 고즈넉한 시간을 즐길 수 있다. 때로는 역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약속을 잡는 것이 장점이 되기도 한다. 주택가였던 동네가 시간이 흐르면서 레스토랑이나 사무실로 바뀌는 모습을 관찰하며 걷다 보면, 약속장소에 가기까지의 여정과 동네의 맥락이 그날의 모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휴일이나 시간이 날 때마다 평소 가보고 싶었던 동네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변화와 분위기를 관찰하는 일은 나의 큰 즐거움 중 하나다.
내가 처음 도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각 도시의 유명한 랜드마크 건축물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렌조 피아노Renzo Piano,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 프랭크 게리Frank Owen Gehry, 장 누벨Jean Nouvel과 같은 유명 건축가들이 디자인한 하이테크 건축물을 보기 위해 기꺼이 비행기를 탔다. 그들의 건축물을 보며 문화적 충격까지는 아니어도 충분한 자극과 영감을 받았다. 2007년 도쿄의 롯폰기힐즈도 그중 하나였다. 호텔과 오피스, 각종 상업시설과 F&B 시설, 광장, 갤러리 그리고 녹음 공간이 한데 모인 믹스드 유즈Mixed Use 단지는 분명 도심인데 어느 소도시처럼 느껴졌다. 롯폰기힐즈에 감명을 받고 그곳과 비슷한, 큰 규모의 도시개발 공간들을 다녀보기도 했다.
다만 시간이 흐를수록 대규모 개발이나 유명 건축물보다 그곳에서 한발 떨어진 우리가 사는 동네, 그 지역의 생활감이 느껴지는 곳들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요즘 도시에는 전부 가보기도 어려울 만큼 화려한 공간들이 생겨나고 있지만, 삶 자체를 느끼기란 어렵다. 도시도 결국은 하나의 동네이자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인데 말이다.
20세기 말, 21세기가 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크게 변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기술은 발전했지만,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지는 못했다. 우리는 여전히 20세기에 지어진 건물에서 살고 있다. 오히려 새로운 건물을 짓는 대신 오래된 건물을 고쳐 쓰고, 자신이 사는 동네를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세계 곳곳에 100층 이상의 건물이 들어서고 있지만, 많은 이들이 오히려 옛 건물을 되살려 현대 생활에 맞게 고치는 도시재생과 재생건축에 신선함을 느끼고 관심을 갖는다. 우리가 공간을 다니며 좀 더 인간적인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 하는 것도 이러한 정서와 맞닿아 있다.
우리의 삶이 하루하루 달라지듯 동네도 달라진다. 동네가 변화하면서 지금껏 없었던 새로운 집단의 사람들이 이주해 오면 처음에는 동네의 생태계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익숙했던 가게들이 사라지고 외부인을 위한 곳들이 들어서면 원주민들은 당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가게들이 동네에 뿌리를 내리고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면 그런 변화를 반대할 주민은 없을 것이다. 기존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자연스레 변하는 지역, 기존의 주민과 이주민이 함께 만들어가는 동네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공존이 느껴진다. 오랫동안 머물고 싶고 다시 찾아오고 싶고, 그 동네를 즐기고 싶어진다.
그러한 곳들을 찾아다니는 동안, 동네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며 지역과 도시의 변화에 앞장서는 사람들에 대해 더 깊숙이 알고 싶어졌다. 그들의 공간기획에 대한 이야기를 나만의 시선으로 정리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지역적, 역사적, 사회적인 관점에서 그 공간만이 갖는 맥락Context이 있는지를 판단했다. 각각의 장소마다 토지가 갖고 있는 지역성이나 역사, 토지에 관련된 스토리는 그 공간 고유의 컨셉을 설정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다음으로는 공간의 맥락과 라이프스타일을 기반으로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특별한 콘텐츠Content가 있는가? 마지막으로 콘텐츠를 통해 지역 주민들과 상호작용하며 연결되는Connect 공간인가? 이 3가지는 그 공간만의 특별한 컨셉을 구성하는 요소이자,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는, 즉 지속가능한 공간의 조건이기도 하다.
공간에 대한 진심이 통했던 것일까, 감사하게도 제안한 모든 분들이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주셨다. 중간주거라는 새로운 주거 형태를 만들어가는 문도호제 건축사무소, 도쿄 신키바에서 목재창고를 개조해 목재를 사용한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편집숍 카시카, 인천 가좌동에서 화학공장을 개조해 만든 복합문화공간 코스모40, 시모키타자와에서 새로운 상점가를 만들어가는 보너스 트랙의 우치누마 산타로, 제주도와 서울 서촌에서 지역의 특성을 살린 스테이를 만들고 직접 운영하는 지랩, 도쿄 니혼바시 하마초에서 ‘마을 만들기’를 진행하는 UDS의 하마초 호텔, 서울 연희동에서 70여 채의 일반 주택을 개조하여 마을의 색깔을 바꾼 쿠움건축사무소, 30년 동안 도쿄의 다이칸야마에서 살기 좋은 동네를 만드는 데 앞장선 힐사이드 테라스까지, 모두 동네와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는 공간으로 우리가 사는 도시를 바꾸어가는 사람들이다.
다양한 공간에 대해 다양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결과, 결론은 하나였다. 도시의 미래는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내가 사는 동네를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는 개개인의 노력이 도시를 바꿀 수 있다. 이 책을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바라봐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동네와 도시를 좀 더 알아갈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다.
이원제